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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식품외길 '송학식품'

김상엽 강사(김쌤) 2010. 12. 2. 11:27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있는 송학식품에 들어서면 김이 모락모락나는 가운데 가래떡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설날을 앞두고 방앗간에서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다.

성호정 송학식품 회장(왼쪽 두 번째)이 직원들과 떡국용 떡의 품질 향상 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 떡은 65개국으로 수출된다. /파주=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이를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과정을 거쳐 허가받은 사람만이 생산라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반도체공장처럼 방진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뒤 에어샤워를 해야 한다. 장화를 소독하고 손과 입안도 세정해야 한다.

그 뒤에 안으로 들어서면 100m가 넘는 생산라인을 타고 수십 종의 기계를 거쳐 '떡국용 떡'이 생산된다. 우선 쌀이 도착하면 물에 퉁퉁 불린다. 그 뒤 롤러를 통해 곱게 빻아 가루를 만들고 떡시루에서 찐 뒤 성형기를 통해 가래떡을 만든다. 이 떡은 진동 컨베이어를 통해 이송된다. 중간에 부스러기는 진동 컨베이어 아래로 떨어트린다. 그 뒤 멸균포장된다. 포장과정도 까다롭다. 먼저 주정을 통해 떡을 일일이 소독한 뒤 정밀하게 무게를 달고 봉지에 담는다. 이때 산소흡수제도 삽입된다. 주정은 떡을 상하지 않게 하며 산소흡수제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공기 중 세균을 멸균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완성된 떡국용 떡은 트럭에 실려 전국으로 나간다. 이 회사가 만드는 제품은 떡국용 떡과 떡볶이용 떡,국수,냉면,만두 등 350종에 이른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도 나간다. 수출 국가는 무려 65개국에 이른다. 미국 캐나다 등 북미,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남미,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과 호주 등이다.

성 회장은 "연간 수출액은 전체 매출 550억원의 약 10%인 500만달러에 달한다"고 말했다. 해외로 내보내는 식품이 고급은 아니다. 배고플 때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영원히 잊지 못하는 맛있는 먹을거리다.

그래서 이들 식품은 미국 뉴욕과 뉴저지 로스앤젤레스,캐나다 토론토 밴쿠버,일본 도쿄 오사카 등 한국인 동포와 주재원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수출된다. 이들 지역 한인타운 가게에는 어김없이 송학식품의 떡볶이용 떡과 냉면 등이 자리잡고 있다. 해외 한식당에서도 이 제품을 재료로 삼는다.

경기도 파주와 충북 청원에 공장을 두고 있는 송학식품이 하루에 소비하는 쌀은 80㎏짜리를 기준으로 500가마에 달한다. 밀가루는 20㎏짜리를 기준으로 600~1200포대에 달한다. 엄청난 양이다. 전통식품업체로는 손에 꼽히는 규모다.

성 회장은 고생을 무척 많이 한 기업인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남들이 중학교에 다닐 나이인 15세 때 뻥튀기 장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경북 영천 태생인 그는 부친이 부산에서 국수 사업을 하다가 망하자 서울로 올라와 용산전자상가 부근 개울가 무허가 판잣집에서 생활했다. 6남매의 장남으로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게 된 그는 뻥튀기 장사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 뻥튀기를 자전거 뒤에 싣고 인천 수원으로 팔러 다녔다. 툭하면 통행금지 위반으로 파출소에 끌려가 혼나기도 했다.

그런 성 회장이 어떻게 국내 굴지의 전통식품업체를 일궈냈을까. 그는 뻥튀기 장사를 한 뒤 서울 신길동에 약 16.5㎡(5평)짜리 국수가게를 차렸다. 이게 1970년.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가게 위에는 다락을 만들어 가족들이 살았다. 여기서 만든 국수는 길거리에서 널어말렸다. 당시엔 배고프던 시절이어서 국수가 불티나게 팔렸다. 굵은 멸치로 우려낸 국물에 국수를 삶아 김치와 함께 먹으면 별미였다. 열무김치국물에 국수를 말아 참기름 몇 방울을 뿌리면 지나가는 사람도 군침을 흘리던 시절이었다. 국수가게가 잘 되자 아예 독산동에 국수공장을 차렸다. 이후 파주로 공장을 확장했다.

그가 성공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40년 전통식품 외길을 걸었다. 창업 이후 한 번도 외도를 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 질 좋은 쌀과 밀가루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재료가 좋아야 맛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연간 100여종의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한다. 성 회장은 "개발제품 중 제품화되는 것은 10%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혼신의 힘을 다해 신제품 개발에 몰두한다"고 강조한다. 7명의 연구 · 개발(R&D) 전문인력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만이 연구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전 직원이 개발요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직원들에게 틈나는 대로 자사 제품을 먹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생산제품이 축나는 게 아닐까. 그의 지론은 다르다. "자기가 생산한 제품을 먹어봐야 맛을 알고 평가를 할 게 아닌가"하고 반문한다. 이를 통해 반응을 살핀 뒤 제품 생산에 반영한다.

셋째,다양한 기술개발이다. 이 회사 생산라인에는 수십 종의 기계가 있다. 밥을 찌고 이송하고 성형하는 모든 장비를 성 회장과 임직원이 직접 개발했다. 이들 설비는 국내외 어디에 있는 제품과도 다르다. 전부 독자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주정을 이용한 보관방법을 고안해 상온에서 장기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성 회장은 "주정은 순도 96%의 원액으로 비싸지만 식품 보관효과가 좋다"며 "송학식품에서 쓰는 주정만 월 5000만~6000만원어치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국내 최초로 쌀국수를 개발해 특허도 출원했다.

그는 공부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지천명(知天命 · 50)이 넘은 나이에 장로회총회신학교를 졸업했고 연세대 언론홍보 최고위과정도 수료했다. 어린 시절 배고팠던 경험을 잊지 못해 사업을 하면서 남들을 도와주는 삶을 살고 있다.

국내 고아원과 양로원 130여곳에 떡 등을 보내 돕는다. 케냐와 북한에는 옥수수와 밀가루를 보내 하루 한 끼 기준으로 1만20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공급하고 있다.

케냐에는 산자락에 100m 이상 깊이로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박아 지하수를 퍼낸 뒤 파이프를 통해 1만명 이상이 마실 수있는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케냐 방문시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주위에서 위험하니 그만 가라고 말려도 케냐를 방문해 이들을 돕고 있다. 굶주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는 볼리비아 동티모르 등도 지원했다.

성 회장의 꿈은 단순하다. 모든 사람이 굶주리지 않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업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해 키가 160㎝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큰 거인인 셈이다.

출처: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