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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섬유(1초만에 마르는 섬유)의 최강자 '벤텍스'

김상엽 강사(김쌤) 2010. 12. 23. 10:19

2005년 봄.벚꽃이 화사하게 핀 일본 오사카.한국인 2명이 가방을 들고 이른 아침 싸구려 비즈니스호텔을 나섰다. 고경찬 벤텍스 대표(49)와 직원이었다. 허름한 가방 안에는 섬유원단이 들어 있었다. 호텔 근처에서 김밥 조각과 된장국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미쓰비시상사로 향했다.

오사카에 온 지 벌써 며칠째.이토추 마루베니 등 굴지의 종합상사를 찾아다녔지만 문전박대를 당해온 터였다. 아예 한명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표정은 밝지 않았지만 반드시 비즈니스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굳은 결의만은 역력했다. 종합상사의 섬유 부문은 주로 오사카에 있었다.

미쓰비시상사에서도 문전박대는 여전했다. 하지만 고 대표는 간청했다. "딱 1초만 시간을 달라"고.접견실로 내려온 미쓰비스상사의 과장급 담당자는 "도대체 뭣하러 여기까지 왔느냐"며 "어서 용건을 말해보라"고 닦달했다.


고 대표는 가방 속에서 섬유원단을 꺼낸 뒤 갑자기 물을 부었다. 그 물은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빠져나갔다. 물을 부은 부분은 어느새 말라 뽀송뽀송했다. 마술을 보는 듯한 광경에 미쓰비시 담당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고 대표가 개발한 '1초 만에 마르는 섬유'였다. 제품명은 '드라이존(DRY-ZONE)'이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섬유 선진국이다. 일반 섬유는 물론 기능성 섬유도 세계 최강이다.

며칠 뒤 이번에는 미쓰비시 사람들이 줄지어 잠실로 향했다. 하도 자주 찾아와 이 회사 문턱이 닳을 정도가 됐다. 얼마 뒤 이 회사에 10억원을 투자했다. 미쓰비시 역사상 섬유업체에 투자한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처음이었다. 아울러 벤텍스 제품의 일본 내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요청해 이를 얻어냈다.

미쓰비시와의 일본 내 독점 거래는 지난해로 끝났다. 벤텍스는 지금 이토추 미쓰이 등에도 수출한다. 거래선도 노스페이스 뉴발란스 컬럼비아스포츠 데상트 펄이즈미 등 세계적인 유명 아웃도어 의류업체 수십개로 확장됐다. 5년 전 5명에 불과하던 벤텍스의 종업원은 이제 38명으로 7배 이상 늘었다. 미미했던 매출액도 지난해 162억원을 기록했고 올해는 210억원,내년에는 300억원이 넘을 것으로 회사 측은 내다보고 있다.

고경찬 벤텍스 대표(왼쪽)가 직원들과 함께 '1초 만에 마르는 섬유'인 '드라이존'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도대체 '1초 만에 마르는 섬유'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각국 바이어들이 열광하는가. 운동할 때 땀이 차면 기분이 좋지 않다. 운동효과도 떨어진다. 땀이 나도 뽀송뽀송한 느낌을 얻을 수 없을까. 제품 개발은 이런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일고를 거쳐 성균관대 섬유공학과에서 학사부터 박사학위까지 마친 그는 운동마니아다. 특히 달리기를 좋아한다. 한강 둔치에서 하루 평균 10~20㎞를 달린다. 때로는 30㎞까지 뛴다. 그런데 땀 때문에 옷이 달라붙자 이를 개선할 방법이 없을까 연구했다. 동시에 이슬비 정도는 투과시키지 않는 원단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했다.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실험을 거듭했다. 잠잘 때도 머리맡에 메모지를 둔다. 꿈속에서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적기 위한 것이다. "1000번 정도 실패했을 거예요. 그런 뒤 개발했지요. "

대학 졸업 후 코오롱을 거쳐 직원 1명을 데리고 서울 도곡동에서 1999년 창업했다. '드라이존'의 원리는 이렇다. 섬유를 3차원 입체조직으로 만든다. 피부에 닿는 면은 1차 공극모세관 현상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화학적으로 분자구조를 바꾼다. 중간층은 수분을 수직으로 이동시키는 엘리베이터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조직을 설계한다. 겉면은 수분이 넓게 확산될 수 있도록 섬유의 유체마찰 계수를 제어해 만들었다. 땀은 피부면에서 흡수된 후 물리 · 화학적으로 연속 3단계 모세관 현상을 일으키면서 순식간에 외부로 방출된다. 이에 따라 피부면은 1초 만에 건조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객관적으로 실험할 장치가 없었다. 눈앞에서 보여줘도 잘 믿질 않았다. 그래서 수분측정기 등 각종 장비도 독자 개발했다. 수분이 있으면 "삐~익"하는 경보음이 울린다. 땀의 이동 상황을 컴퓨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동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수분관리테스터(MMT · Moisture Management Tester)도 개발했다.

고 대표는 "이 원단은 하이서울 브랜드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산업통상진흥원의 협조를 받아 2008 베이징올림픽 중국 대표팀과 스웨덴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유니폼 소재로 공급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와코루 제품인 'CW-X'의 핵심 소재와 국내 프로야구단의 언더셔츠로도 선정됐다. "내년도 미국 노스페이스의 아웃도어 의류 주요 제품의 원단으로 결정됐다"고 덧붙인다.

'아이스필'이라는 원단도 선보였다. 고 대표는 "나노 아쿠아켐 가공에 의해 적외선을 차단하고 자일리톨 가공을 통해 냉감(冷感) 기능을 갖도록 한 원단"이라고 말했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70건에 이른다. 이중 온도제어형 복합섬유,보습원단,복합냉감성 원단 등 61건은 특허 등록했다. 출원 중인 것도 9건에 이른다. 다산기술상을 비롯해 대통령표창 등 수많은 상과 표창을 받았다. 대일수출 유망 100대 기업,하이서울 글로벌스타기업으로도 선정됐다.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드라이존이 땀을 1초 만에 건조하는 1단계 기술이라면 아이스필은 2단계 기술이다. 지난 3월 발표한 '수분감응형 자기변신 스마트섬유 오토센서'는 3단계 기술이다. "오토센서는 땀이 나면 섬유 스스로가 마치 옷을 벗은 것처럼 피부에서 떨어졌다가 운동 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섬유"라고 설명한다.

벤텍스 연구진은 연구전문인력 6명과 현장에서 피드백을 해주는 현장전문인력 6명 등 모두 12명이다. 전체 인원의 31%에 해당한다. 이 회사의 연구소에는 '불가능한 가능을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다. 회사의 정신은 '머물지 않는 천년의 청년정신'이다. 결국 청년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를 방문하면 섬유산업이 어느 분야보다 첨단산업이 될 수 있다는 게 느껴진다.

출처: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