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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보/알짜 강소기업

자동차 선바이저로 세계 제패 '오토크로바'

김상엽 강사(김쌤) 2010. 10. 11. 10:06
이홍식 회장(오른쪽)과 아들 이관민 실장이 자사 제품인 크롬선바이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대구=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1997년 10월 고려대 산업공학과 2학년생이던 이관민 오토크로바 경영지원실장(34)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아버지 이홍식 회장(60)이 20여년간 운영하던 진흥공업사가 부도를 맞았다는 것.쌍용차에 콤비스위치를 납품하면서 매출 150억원,직원 100여명에 달했던 잘 나가던 회사가 자금경색으로 흑자부도를 낸 상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존경하던 분이 아버지였습니다. 당연히 대학을 졸업하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도중에 목표가 사라진 셈이죠."

부도충격은 간단치 않았다.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갓 준공한 공장 3곳을 팔아치울 수밖에 없었다.

이 실장은 "아버지는 항상 제조업체 대표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직원들,협력사들,그 가족들을 한 식구처럼 여겼던 아버지가 공장이 팔려나가면서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무척 힘들어하셨다"고 회상했다.

◆부자(父子),다시 일어서다

등록금이 없어 군에 입대한 이 실장에게 가업 승계는 잊혀진 꿈이었다. 무엇보다 생계를 잇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졸업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삼성SDS에 입사해 악착같이 일했다. 덕분에 회사 내에서도 핵심부서라고 불리는 재무팀에 근무하며 동기들 중에 처음으로 대리 직급에 올랐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회사를 다시 살려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회사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사명을 오토크로바로 바꾼 뒤 직원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명맥을 유지하던 상황이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매출은 10분의 1로 줄어들고 생산시설도 사출공장 하나만 남았다. 다행히 기존에 개발했던 자동차용품 크롬선바이저가 효자 노릇을 했다.

선바이저는 자동차 문 위쪽에 붙여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하는 제품이다. 이 회장은 아들을 영입해 회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고생길'이라며 만류했지만,이미 그의 마음은 돌아선 뒤였다. 이 실장은 "아버지는 어떤 일이든 제게 강요한 적이 없고 대화를 강조하셨다"며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함께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가업을 잇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크롬선바이저,국내 시장 점유율 40%

이 실장이 처음 맡은 일은 영업이었다. '영업을 하면 고객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알면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 회장의 경영관이 반영된 결정이다. 영업력을 키우는 것은 오토크로바가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던 '부품'회사에서 자동차 용품을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는 '용품'회사로 탈바꿈하기 위해 필수적이기도 했다. 그는 "오토크로바가 자신의 브랜드로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물건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가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아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크롬선바이저는 기존에 이 회장이 개발한 스모크선바이저에 크롬 도금을 한 제품이다. 쉽게 마모되지 않고 장식성도 뛰어나 자동차 용품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됐다. 이 제품은 창틀이 없는 형태로 출시된 그랜저XG 구매 고객들에게로부터 높은 관심을 얻었다. 회사는 선바이저 국내 시장 점유율 1위(40%)를 달성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꾸준히 신제품 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다.

내수영업에서 자신감을 얻은 이 실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는 2006년 프랑크푸르트 오토메카니카를 시작으로 2006년 라스베이거스 세마쇼,2007년 두바이 자동차부품전시회,2007년 디트로이트 자동차부품전시회 등 주요 해외전시회를 찾았다. 회사는 2007년 처음으로 두바이에 선바이저를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그전까지 100% 내수에만 의존하던 회사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었다. 올해 수출 목표는 150만달러.

국내외 영업력을 보강하자 매출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2007년 42억원,2008년 58억원,지난해 62억원을 기록했다. 이 실장은 "올해 매출은 80억원에 이를 것"이라며 "아직 부도 이전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곧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노하우 · 경험 등 무형의 자산이 더 중요

이 회장은 아들이 대견스럽다고 했다. 그는 "한 번의 실패로 인해 아들에게 재산이나 공장설비를 물려주진 못했지만 기업경영 노하우와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며 "제조업은 하루 아침에 기술력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무형의 자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요샌 아들이 먼저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가업 승계를 통해 뛰어난 제조역량을 갖춘 업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출처: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