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업계는 대표적인 ‘금녀 산업’으로 꼽힌다.
물론 ‘여자는 중공업 회사에 취업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많은 여성이 중공업 특유의 무겁고 남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선뜻 진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회사 측도 여성이 ‘스펙’(학점 자격증 영어성적 등 취업 때 제출하는 구직자의 객관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한 것이 사실이다.
두산중공업 발전기술팀의 김지윤(26) 씨. 고려대와 포스텍 대학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2004년 12월 입사했다. 입사 동기 70명 중 여자는 3명뿐이었다.
아담한 체구와 나긋한 말투. 중공업 회사의 사원, 그것도 플랜트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김 씨는 입사 2년 남짓 만에 ‘두산맨’으로 확실히 자리 매김 했다는 평가를 주위로부터 듣고 있다. 두산맨으로 성장하기까지 그의 여정은 어땠을까.
중공업 회사가 원하는 인재
○ 면접 때부터 여자가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남자들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자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어요?”
1차 면접이 끝나갈 즈음 한 면접관이 던진 질문이다. 갑자기 모든 면접관의 눈이 반짝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저는 공대 여자입니다. 학부 4년과 대학원 2년을 합해 6년간 남자들과 생활하고 경쟁했으니 싸워본 경험도 많았겠죠? 물론 이긴 적도 많았습니다. 여자라서 소극적이고 주눅 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답변은 당당하게 했다. 하지만 내심 ‘중공업 회사는 어쩔 수 없구나’란 생각을 했다.
비슷한 질문이 2차 면접과 최종 면접에서도 나올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남자들과 경쟁하고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됐다고 판단했는지 2차와 최종 면접에선 전공지식과 장래 희망, 삶의 가치관을 묻는 질문만 있었다.
김 씨는 “회사가 나를 ‘여자’가 아닌 ‘인재’로 대한다는 느낌이 2차 면접 때부터 들었다”며 “실력만 있으면 여자라는 이유로 엔지니어로 성장하는 데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부드러움으로 딱딱함 녹여
○ 한 달 만에 현장을 바꿨다
기본 연수를 마친 뒤 김 씨는 생산혁신을 담당하는 기획조정실 LM(Lean Management)팀에 배치됐다. 한 달 만에 김 씨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대학원에서 전공한 ‘서비스 품질관리’를 업무에 어떻게든 적용해 보라는 것이었다.
‘소비재 기업이 아닌 두산중공업에 서비스 품질관리를 적용하라고? 그것도 생산혁신을 담당하는 팀에서?’
생뚱맞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일주일 정도 고민하다 ‘회사 직원=고객, 업무 만족도=서비스’란 개념으로 접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구체적으로 보일러와 터빈 공장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를 개선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특유의 적극성을 앞세웠고 여자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현장을 찾았다.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로 딱딱하고 거친 공장 분위기를 녹였다. 나이 지긋한 현장 직원들을 따라다니며 친분도 쌓았다. 조금씩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만과 소망을 이끌어 냈다.
현장 직원들은 플랜트 기술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수십 년간 쌓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모든 자료를 엑셀과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증발해 버리는 노하우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엑셀과 파워포인트 교육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문제는 교육 수준이었죠. 단순히 문서만 만드는 기술로 충분한 사람들에게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가르치려고 했거든요.”
김 씨는 문서화 작업에 필요한 기술만을 가르쳐 주는 일주일 과정의 강좌 개설을 건의했고 스스로 강사 역할까지 맡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강 희망자가 밀려드는 바람에 강의는 3주간 진행됐다. 마지막 강의가 끝난 다음 날 아침 그에게는 박지원 기획조정실장(부사장급)이 보낸 e메일이 와 있었다.
“입사 후 처음 맡은 임무를 적극적으로 잘 수행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여자 후배들의 견인차를 목표로
○ 스펀지가 되라
여성으로서 ‘남성(?) 기업’에 다니는 데 따른 어려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업무나 인간관계로 불편한 적은 별로 없어요. 하지만 10년, 20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여자 선배들이 없다는 건 아쉽습니다.”
경영과 엔지니어 직군을 통틀어 두산중공업에는 차장급 이상의 여성 사원이 없다. 특히 엔지니어 직군에선 여성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김 씨는 화력 플랜트 설계를 담당하는 아키텍처 엔지니어링 부문에 있는 150여 명의 엔지니어 중 홍일점. 다른 부문의 여성 엔지니어를 모두 합해도 10명이 안 된다. 김 씨가 올 2월부터 속한 발전기술팀은 기계공학 지식이 많이 필요한 분야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그에겐 생소한 분야지만 적응이 힘들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잘 받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사람이라면 두산중공업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선배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일일이 가르쳐 주는 문화가 조성돼 있거든요.”
업무 특성상 중공업 회사에선 기술 노하우가 철저히 전달되어야 하고 팀워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선 남녀 구별이 무의미하다. 오직 동료일 뿐이라고 김 씨는 주장한다.
“10년, 20년 뒤엔 플랜트 시장과 기술 트렌드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요. 그때 두산중공업에 들어올 여자 후배들이 제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장래를 디자인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요.”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두산이 원하는 인재…세상을 아우르는 글로벌 감각이 핵심▼
두산은 ‘사람의 성장을 통한 사업의 성장’을 뜻하는 2G(Growth of Business, Growth of People)를 인재경영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모든 직원을 글로벌 수준의 업무능력과 마인드를 갖춘 인재로 육성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회사의 이런 전략은 ‘기본기’가 제대로 갖춰진 인재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두산이 선호하는 인재에는 크게 4부류가 있다.
첫째, 도전과 성취가 생활화돼 있는 사람이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눈높이를 높이고 설정한 목표에 맞는 성과를 내는 ‘프로의식’의 소유자를 뜻한다.
둘째, 원칙이 있고 주위 사람과 함께 발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팀워크를 소중히 여기는 건 21세기 기업인의 기본적인 자질이다.
셋째,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유연성은 기본이다. 새로운 지식을 왕성하게 흡수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두산의 인재다.
넷째, 도약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다. ‘우물 안 개구리’와 ‘현상 유지형’ 마인드와 지식으로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담당 분야의 경영, 기술, 트렌드에 대한 전문성이 풍부하고 글로벌 지수가 높은 사람이 많은 기업이 미래가 있는 기업이다.
두산은 이미 다양한 인재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개인의 성장을 독려하고 있다. 앞으로는 글로벌 기업으로 본격 도약하기 위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핵심 인재에 대한 교육과 기회 제공, 보상을 좀 더 파격적으로 할 계획이다.
김무환 상무 ㈜두산 전략기획본부 인사기획팀 출처: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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