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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압기로 세계 50여개국 네온사인을 밝히는 '대한트랜스'

김상엽 강사(김쌤) 2010. 10. 11. 09:58

 

 

김진환 대한트랜스 사장이 인천 송도신도시에 있는 본사 전시장에서 자체 기술로 제작한 LED조명을 들어보이고 있다. /인천=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빌딩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면 '회색 도시'였던 서울은 '빛의 도시'로 변모한다.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서울의 야경은 수많은 가로등과 자동차 불빛,고층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조명,그리고 거리의 네온사인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이 중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를 내뿜는 네온사인은 밤 풍경에 낭만을 더해주는 일등공신이라 할 만하다.

네온사인은 네온이란 이름의 기체를 넣은 유리관에 전류를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빛을 내는 장치.하지만 가정이나 일반 사무실에서 쓰는 220V(볼트)로는 네온사인을 밝힐 수 없다. 네온사인이 빛을 내려면 1만5000V의 고압이 필요해서다. 따라서 모든 네온사인에는 220V를 순간적으로 1만5000V로 바꿔주는 '네온 트랜스(변압기)'가 들어간다.

대한트랜스는 국내에서 가장 큰 네온 트랜스 제조업체다. 시장 점유율은 약 40%.지난해 매출은 80억원 안팎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50여개국에 수출한다. 2대 김진환 사장(40)은 "기술력만 놓고 보면 대한트랜스는 네온 트랜스 분야에서 세계 으뜸이라고 자부한다"며 "현재 20위권인 글로벌 매출 순위를 5년 내 10위권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한트랜스의 출발은 초라했다. 조선대에서 수물리학(數物理學)을 전공한 김봉균 회장(70)이 서울로 올라온 때는 1969년.'대한민국이 공업화에 들어간 만큼 전기 관련 수요가 많아질 것'이란 생각에 서대문 사거리에서 소규모 전기업체를 운영하던 외삼촌을 찾아갔다. 당시만 해도 콘센트나 트랜스 등 웬만한 전기용품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자체 제작해 상표도 없이 판매했다.

외삼촌 어깨 너머로 실무를 익힌 지 한 달 만에 김 회장은 독립을 선언했다. 퇴계로에 1평짜리 허름한 점포를 얻고 대한전기공업사를 세운 것.패기는 넘쳤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하루종일 서울 전역을 휘젓고 다녀도 일감을 단 한건도 못 따내기 일쑤였다. 국내 최초로 전기방석을 만들었지만 온도 조절 센서 불량 탓에 제품값을 물어주느라 오히려 빚만 졌다.

김 회장은 결국 1년 만에 첫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한 번 실패로 포기할 김 회장이 아니었다. 다시 도전에 나섰다. 아이템은 당시 수요가 많았던 가정용 트랜스.기존 제품을 사들여 모조리 분해한 뒤 이를 재조립하면서 구조와 원리를 익혔다. 일단 한 대 분량의 부품을 구입해 '김봉균표' 트랜스를 만든 뒤 구매자를 찾기 위해 서울을 돌아다녔다. 한 대를 팔면 다시 한 대를 만들 수 있는 부품을 사서 조립했다. 미리 여러 대를 만들어 놓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기를 1년여.돌파구는 점포를 옮기면서 열렸다. 종로구 예지동으로 가게를 이전하면서 외부에 제품 진열장을 마련한 것이 히트했다. 소비자들이 진열된 제품의 성능과 가격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구매 결정을 내리면서 판매량이 단숨에 2~3배 뛰었다. 김 회장은 아이디어를 하나 더 보탰다. 인근 전기제품 가게마다 대한전기공업사 이름으로 진열장을 놓아주기로 한 것.트랜스가 많이 팔리면 가게들의 이윤도 늘어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김 회장의 손재주와 진열장 마케팅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김 회장은 여세를 몰아 1973년 성수동에 공장을 지었다. 가내 수공업으로 시작한 가게가 명실상부한 제조기업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사업은 번창일로를 달렸다. 대한트랜스가 국내 최초로 점화용 트랜스를 개발한 1979년은 이 회사의 최고 전성기였다. 성수동 공장보다 훨씬 큰 인천 부개동 공장을 풀가동해도 폭증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1986년에는 기계식 네온 트랜스를 제품 목록에 추가했고 1989년에는 사명을 대한트랜스로 바꿨다. 대한트랜스는 1990년대 중반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항했다.

'잘 나가던' 대한트랜스도 외환위기를 맞아 존폐의 기로에 섰다. 거래처에 물품을 판매하면서 받은 어음이 하나 둘씩 부도가 났기 때문이었다. 부도 액수는 총 14억원.당시 대한트랜스의 매출이 70억원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결국 대한트랜스는 공장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장을 세운 마당에 모든 직원을 안고 갈 수는 없었다. 김 회장은 전 직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59명을 내보냈다. "회사가 정상화되면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과 함께.그는 남은 직원 27명과 회사 살리기에 나섰다. 시집 간 딸의 집까지 담보로 잡히면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김 회장 스스로도 승용차를 팔고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출퇴근했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중소기업청으로부터 9000만원을 지원받아 개발한 전자식 네온 트랜스였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구소 인력만큼은 유지한 덕분에 당시로서는 독보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 제품 판매가 본격화하면서 1998년 29억원까지 떨어졌던 매출은 이듬해 70억원 수준으로 올라섰다. 회사가 정상화되자 김 회장은 2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사를 떠난 직원을 불러들였다. 그동안 다른 회사에 들어간 사람을 제외한 퇴사자의 절반가량이 대한트랜스에 재취업했다.

장남 김진환 사장이 대한트랜스에 합류한 것은 회사가 정상화된 직후였다. 일본(히로시마대)과 미국(머서대)에서 각각 법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김 사장은 사실 가업 계승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가업이 끊겨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설득에 검사의 꿈을 접고 2001년 생산과장으로 입사했다.

김 사장은 2년간 생산 영업 마케팅 재무 등 주요 부서를 거치며 경영자 수업을 받은 뒤 2003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대표가 된 뒤 그는 대한트랜스의 비합리적인 사업구조를 고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대한트랜스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주상변압기 사업을 접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1990년대까지 상당한 이익을 안겨주던 주상변압기는 2000년대 들어 업체 간 경쟁 과열로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제품'으로 전락했지만,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던 탓에 막상 사업 포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 사장은 줄어든 매출을 네온 트랜스 수출과 신규 사업인 LED 조명으로 만회하기로 했다. 이 전략은 주효했다. 김 사장 취임 전 5개국에 불과했던 네온 트랜스 수출국은 50여개국으로 늘었고,그가 진두지휘한 LED 조명 사업도 쑥쑥 커가고 있다. 주상변압기 사업을 접기 전에 비해 매출은 40억원가량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20억원 적자에서 10억원 흑자로 전환됐다. 김 사장은 "LED 조명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는 올해는 매출 150억원에 30억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출처 : 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