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미국과 유럽에서 일본 상품은 조잡한 싸구려의 대명사였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과 함께 본격적인 산업화에 발을 내디뎠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무렵에도 서구 선진국의 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급 브랜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장신구업체 미키모토와 서양식 식기업체 노리타케다. 노리타케의 경우 100년간 미국인의 식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이젠 노리타케가 자국의 고가 브랜드라고 착각하는 미국인도 적지 않다.
○ 일본 브랜드 인정받는 데 앞장
일본 제조업의 심장부인 아이치(愛知) 현 나고야(名古屋) 시가 도요타박물관과 더불어 산업관광 명소로 내세우는 ‘노리타케의 숲’.
4만4960m²에 이르는 터에 자리 잡은 공원, 식기박물관, 크래프트센터(도자기 제조공정을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 주는 곳), 식기전문 매장 등에는 오전 시간인데도 나고야 시민과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노리타케 측이 옛 공장 터의 일부를 활용해 조성한 이곳의 연간 방문객은 40만 명에 이른다.
‘노리타케의 숲’에 인접한 낡은 본사 건물에서 아카하네 노보루(赤羽昇) 노리타케 사장이 기자를 맞았다.
아카하네 사장은 ‘노리타케가 세계적인 식기 회사로 100년 이상 명성을 날린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기업이 되자는 정신이 줄곧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리타케가 1940년대 후반 잠시 생산했던 ‘로즈 차이나’ 브랜드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 신용이 일류 브랜드를 만든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식기 시장은 유럽 고가 브랜드들의 독무대였다.
노리타케는 ‘좋은 품질에 싼 가격’이라는 강점을 앞세워 빈틈을 파고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을 계기로 미국시장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노리타케는 최대 시장인 미국시장을 통째로 상실했다. 1년 뒤에는 전시총동원에 나선 일본 정부의 명령에 따라 도자기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노리타케가 생산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인 1945년 9월이었다.
노리타케에는 일본에 진주한 미군으로부터 군용식기 주문이 쇄도했다. 연합군총사령부 측은 1947년 품질 좋은 석탄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알선까지 해 주면서 식기 생산을 독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리타케 경영진은 ‘노리타케 브랜드 사용 중단’이라는 의외의 결정을 내놨다. 전쟁 와중에 숙련공 층이 엷어지면서 예전과 같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노리타케 경영진은 품질이 과거 수준을 회복할 때까지 ‘로즈 차이나’라는 브랜드를 쓰겠다고 회사 안팎에 선언했다.
해외로부터 ‘노리타케 브랜드’를 수출해 달라는 주문이 빗발쳤지만, 경영진은 한동안 ‘로즈 차이나’ 브랜드 사용을 고집했다.
○ “감격에 살고 보수에 죽는다”
대부분의 일반인에게 노리타케는 식기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전체 매출에서 식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불과하다.
나머지 85%의 매출은 도자기 제조기술과 공정, 소재 등을 응용한 공업기자재, 세라믹, 환경엔지니어링, 전자 등 4개 사업부문에서 나온다.
노리타케는 관리와 연구 부문만을 본사에 두고 식기를 포함한 5개 사업부문은 사실상 분사해 독자적인 경영을 시키고 있다.
이 같은 경영시스템은 창업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업일사(一業一社·1개의 사업에 1개의 회사)’의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리타케는 창업 초기부터 유망한 사업을 발견하면 내부에서 싹을 키운 뒤 단일한 기업으로 독립시켜 왔다.
그중에는 일본 화장실용 위생도기용품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TOTO’와 ‘INAX’를 비롯해 일본가이시와 일본특수도업 등 내로라하는 우량기업도 포함돼 있다.
노리타케의 초대 사장인 오쿠라 가즈치카(大倉和親)가 1915년 미국을 시찰하면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어 1917년 독립시킨 TOTO는 연간 매출이 5122억 엔(약 4조 원)으로 노리타케보다 약 4배나 많다.
노리타케의 창업주 모리무라 이치자에몬(森村市左衛門)은 생전에 ‘사람은 감격(感激)에 살고 보수(保守)에 죽는다’(앞으로 나아가야지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는 말을 즐겨 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부문과 기업을 탄생시켜 온 노리타케의 100년사는 모리무라 창업주의 말 속에 싹이 들어있었던 셈이다. 출처: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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