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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일본여행

일본100년기업을가다-1편(만주 시오세)

김상엽 강사(김쌤) 2007. 12. 28. 12:17

 [동아일보]

《기업의 평균수명은 산업화 역사가 긴 미국 유럽에서도 20년을 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신생 기업의 40%가 5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산업화가 늦은 탓도 있지만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백년 기업’은 두산과 동화약품 등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이에 비해 일본은 도쿄(東京) 주식시장에 상장된 ‘백년 기업’만 도시바 NEC 덴쓰 시세이도 등 70개가 넘는다. 소규모 자영업소까지 포함하면 10만 개가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전쟁, 정치 격변, 오일 쇼크, 대공황과 불경기, 강력한 경쟁상품의 출현, 시장 포화, 소비수요의 변화, 금융 경색, 임직원의 스캔들, 회사 조직의 관료화, 자만….

한순간만 방심해도 도산과 폐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런 위기를 수없이 헤쳐 나온 일본 ‘백년 기업’들의 지혜와 의지, 전화위복에 얽힌 이야기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볶은 고기와 야채 덩어리를 흰 밀가루 반죽으로 싼 보통 만두일 것이라는 상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658년 전통의 도쿄 시오세(鹽瀨)총본가 본사 매장에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상의 만주(饅頭·일본식 만두)와 일본과자가 진열돼 있었다.

매장 직원에게 “동아일보 특파원”이라고 밝히자 잠시 뒤 가와시마 에이코(川島英子·83) 회장이 1층까지 마중을 나왔다.

통성명이 끝나자 가와시마 회장은 매장 벽에 걸린 큼지막한 간판을 가리켰다.

‘일본 제일 만주 제조소’. 무로마치 막부시대의 8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49∼1473)의 친필 휘호를 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시오세 총본가의 역사는 이보다 100년 이상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1349년 중국에서 건너온 린조인(林淨因)이 승려들을 위해 고기 대신 팥을 넣어 만든 만주를 공급한 것이 시작이었다.

○시대 흐름을 호흡하는 ‘상(商)’

전업주부였던 가와시마 회장이 시오세 총본가의 34대 사장에 취임한 것은 1980년 2월.

“630년을 이어져 내려온 노렌(暖簾·가게 문 앞에 내거는 상호가 적힌 천)을 내리지 말아 달라.”

경영을 맡고 있던 모친이 급서하면서 남긴 당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가와시마 회장은 과거 ‘일본 과자의 신’이라고 불렸던 부친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제조법을 배우는 동시에 새 판로 개척에 나섰다. 당시 시오세 총본가 매출의 대부분은 결혼식 선물용 주문 만주였다. 가와시마 회장은 출산율 저하 등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 매출이 급감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1983년 마침내 마쓰야 백화점 도쿄 긴자(銀座)점과 매장 신설 합의가 성사됐다.

기존 사원들은 “지금 하고 있는 사업만으로도 일손이 달린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가와시마 회장은 자신이 제품 네이밍(Naming)과 디자인을 직접 하면서 백화점 진출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그의 예상대로 결혼 선물 시장은 이후 급속히 위축됐다. 현재 이 회사의 총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에도 못 미친다. 그의 선견지명과 고집이 없었다면 시오세 총본가는 문을 닫을 뻔했던 셈이다.

하지만 가와시마 회장은 “우리 회사가 658년 간 살아남은 비결은 상(商·영업)이 아니라 장(匠·제조)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경영자는 회사의 주역인 직인(職人)을 키우고, 격려하고, 돕는 부수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658년간 변함없는 ‘장(匠)’

시오세 총본가는 지금도 창업 당시와 똑같이 수작업으로 만주피를 만든다. 밀가루 대신 마와 쌀가루를 섞어 얇게 만주피를 만들어야 함으로 기계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와시마 회장의 설명.

“1개 지역의 생산량으로는 제조 물량을 충당할 수 없어 4개 지역에서 마를 조달한다. 그런데 마는 산지와 날씨에 따라 점성(粘性) 등이 다르다. 20년 이상 수련을 쌓은 직인만이 이런 변덕에도 불구하고 맛과 촉감이 똑같은 만주피를 빚을 수 있다.”

타고난 직인이었던 가와시마 회장의 부친은 재료나 배합 비율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당시 직인들 사이에서는 “시오세 총본가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가와시마 회장의 부친은 전후(戰後)에는 설탕 공급이 끊기자 사카린 등 대체 감미료를 사용하는 대신 가게 문을 닫는 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가와시마 회장은 사장을 맡고 있는 아들에게 틈이 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당부한다.

“회사를 너무 키우지 말라. 경영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생기면 안 된다. 기계화가 불가능한 우리 회사는 지금이 적당한 규모다.”

그에게 ‘만주피 재료를 바꿔 기계화를 하면,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져 봤다.

가와시마 회장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건 시오세 총본가의 만주가 아니다.”